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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스승들

플로티노스

관리자 | 2012.05.08 15:32 | 조회 3516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사후, 그리스의 영적인 수행계에서 가장 큰 흐름을 담당했던 영적인 스승입니다. 일반적으로 철학자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평생 네번정도의 일자와 합일되는 체험인 테오리아를 경험한 신비가 중 한명입니다.

처음에는 영지주의와 비슷한 입장을 취했었지만, 뒤로 갈수록 영지주의자와는 반목했고, 독자적인 노선을 걷게 됩니다. 후에 아카데미아의 4대 학파중 하나를 형성했으며, 그의 문하에서 이암블리코스, 포르피리오스, 프로클로스 등의 걸출한 신비가들이 후에 나오게 되고 그의 저술은 이슬람 수피즘의 형성에 깊은 영향을 줍니다.

신지학의 중심을 담당하고 있는 유출의 교리 등 때문에, 신지학에서는 그를 고대 신비의 전승가로 생각하고, 신지학 사상의 형성에 깊은 영향을 준 고대의 사상가라고 볼수 있습니다.

또, 그의 가르침은 기독교의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해 기독교 안에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되어 기독교의 교리 형성에 큰 영향을 준 철학자라고도 볼수 있습니다.

플로티노스
지한 정신을 지닌 동료이자 숭배자가 쓴 작품이다. 이 저작은 플로티노스 삶의 전반기에 대해 말해주는 몇몇 흥미로운 단편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플로티노스의 생애 마지막 6년에 집중되어 있다. 이 6년 동안 포르피리오스는 스승과 함께 로마에서 살았다. 따라서 65세로 세상을 떠난 플로티노스의 삶을 제대로 그려볼 수 있는 기간은 바로 이 6년간이다.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플로티노스도 노년의 삶만이 알려져 있다. 플로티노스 자신의 저작은 어떤 자전적인 정보도 담고 있지 않으며 젊은시절의 정신이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간접적인 정보도 전혀 없다. 플로티노스는 생애 마지막 15년 동안에 모든 저작을 썼다.

포르피리오스에 따르면, 플로티노스는 자신의 부모·동족·조국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 4세기 후반에 활동한 에우나피오스와 그후의 작가들은 플로티노스가 태어난 곳이 이집트에 있는 리코 또는 리코폴리스라고 썼는데, 이곳은 현재 북이집트의 아슈트 또는 나일 강 연안 델타 지역에 있는 작은 마을인 듯하다. 이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플로티노스의 생애〉나 플로티노스 자신의 저작 어느 구석에도 이집트에 대해 특별히 말하거나 친밀감을 보여주는 대목이 없다. 그리고 플로티노스가 세계적인 대도시인 알렉산드리아에서 철학을 연구했다는 사실도 그가 이집트인임을 입증할 증거는 되지 못한다. 그가 3세기에 라틴어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도 그가 어디 사람인지를 밝힐 수 있는 단서가 되지 못한다. 매우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은 그가 대체로 그리스 말을 사용했고 그리스어로 교육을 받았다는 점이다. 플로티노스는 매우 독창적이지만, 사유방식과 지적·종교적 충실성으로 보면 헬레니즘 전통에 서 있다.

플로티노스는 28세가 되던 해 철학을 연구하고 싶은 충동을 느껴 알렉산드리아로 갔다. 그는 당시 알렉산드리아에서 가장 이름난 학자들의 강의를 들었지만 곧 실의에 빠졌다. 마침내 그를 잘 이해하고 있던 한 친구의 권고로 독학한 철학자 암모니우스 '사카스'의 강연을 들으러 갔다. 플로티노스는 암모니우스의 강연을 듣고 나서 이렇게 외쳤다. "이 사람이 바로 내가 찾던 사람이다!" 그는 암모니우스와 11년 동안 함께 살았다. 암모니우스는 고대 철학사를 통해 가장 신비스런 인물이다. 그는 물론 아주 불확실한 사실이지만 그리스도교의 이단 교파를 신봉한 것 같다. 한두 마디 전해지는 그의 말을 보면, 그는 전통적인 플라톤주의와 아주 비슷한 사상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플로티노스를 그처럼 사로잡을 수 있었고 위대한 그리스도교 신학자인 오리게네스의 철학 스승이었던 사람이라면 분명히 제자들에게 많은 사상을 이야기했겠지만 확실한 내용은 알 길이 없다. 플로티노스가 그와 함께 11년 동안 살았다는 것은 결코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당시에는 어떤 철학학파에 들어가 배움을 마치기까지 대부분 일생을 통해 진리와 선을 추구하고 마침내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공동체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동방원정


암모니우스와의 생활을 청산하고 난 다음 플로티노스는 페르시아와 인도철학을 공부할 생각으로 로마 황제 고르디아누스 3세의 페르시아 원정(242~243)에 참여했다. 그러나 고르디안 황제가 메소포타미아에서 병사들에게 살해당하고 아랍의 필립이 황제로 추대되는 일이 벌어져 원정은 비참하게 끝났다. 플로티노스는 간신히 도망쳐 안티코크로 되돌아왔다. 40세 되던 해에 다시 로마로 가서 거기에 정착했다. 그리스 철학자가 동방의 철학에 관심을 갖는 일은 흔했는데, 그 당시에는 특히 그러했다. 이 원정이 실패한 탓으로 동방의 현인들과 교류할 기회가 전혀 없었지만, 그의 사상은 인도 종교철학과 놀랄 만큼 비슷한 점을 보이고 있다. 종교적·철학적 전통 아래 교육받은 인도인과의 교류가 3세기의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가능하지 않았다는 점은 둘째치고라도 어쨌든 플로티노스의 사상이 지니고 있는 인도 사상과의 유사성은 플로티노스가 물려받은 그리스 전통의 자연스런 귀결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원로원 출신의 고르디안 황제가 지휘한 동방 원정에 플로티노스가 참여했다는 사실, 그가 로마로 갔다는 사실(로마는 대개 철학자들이 잘 정착하지 않던 도시였음), 그로부터 19년 후 포르피리오스가 원로원 귀족출신의 많은 친구들과 제자들에 둘러싸여 있는 플로티노스를 만났다는 사실 등은 그 자신이나 그의 가문이 로마 원로원 귀족들과 매우 긴밀한 인간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을 뜻한다고 해석되어왔다.

로마 생활


처음 로마에 왔을 때부터 263년 포르피리오스와 만난 무렵까지 그의 환경이 어떠했든지간에 플로티노스는 상당히 검소한 생활태도를 지키면서 품위 있고 안락한 생활을 누렸다. 실제 사회활동과 가르치는 일로 사회에서 그의 명성은 높았다. 그는 논쟁에서 심판자처럼 행동했으며 그러면서도 적을 만들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죽음에 임박한 귀족가문의 친구들이 플로티노스를 자손들의 후견인으로 지목하는 일도 많았다. "그의 집은 언제나 어린 사내아이와 여자아이로 가득 차 있었다"라고 포르피리오스는 쓰고 있다. 그는 매우 양심적이고 로마 법률에 따라 친구 자손의 후견인 역할을 했으며, 재산을 관리해주었다. 위대한 사상가들이 으레 그랬던 것처럼 플로티노스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했으며, 비록 사소한 일일지라도 그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도움을 주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내면의 중심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는 어린아이가 하는 말을 귀담아 듣고 친구 부인의 보석목걸이를 훔쳐간 자를 찾아내는가 하면, 포르피리오스가 우울증에 걸려 심각하게 자살을 생각한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분위기를 바꾸어 새로운 교류를 쌓도록 다른 지방으로 여행을 보내기도 했다. 포르피리오스의 묘사에 따르면 그는 "자신과 타인에게 똑같이 충실하며, 그와 어떤 방식으로든 알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마음 편한 사람"이었다. 그는 수많은 친구들의 세속적인 욕망에 눈감지 않으면서도 영원한 어떤 것과 통하는 듯한 인상을 풍기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가 사귄 친구들은 로마 제국의 동쪽 지역 출신자, 로마의 원로원 회원 및 그 부인들과 과부들로 이루어진 세계시민주의자였다. 포르피리오스에 따르면, 플로티노스를 존경하고 후원한 사람들 가운데는 갈리에누스 황제(253~68 재위)와 그의 아내 살로니나도 있었는데 이 덕분에 그는 한때 거창한 계획을 실천에 옮기려고 했었다. 그는 황제에게 캄파니아에 있는 파괴된 도시를 복구하여 그 주변의 땅을 하사해주도록 청했다. 그는 복구된 도시를 플라토노폴리스라 부르고, 그 도시 주민을 플라톤의 이상국가의 법과 관습에 따라 살게 할 계획이었다. 플로티노스는 직접 거기로 가서 친구들과 함께 살겠노라고 공언했다. 플라톤 사상의 정치적 측면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관심하며, 또 공직 생활에서 은퇴하겠다고 설교하고 다니던 철학자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비록 개인적으로는 내키지 않더라도 사정이 닿는다면 플라톤이 말한 도시를 세우는 것이 플라톤주의 철학자인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황제는 그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는데, 사실 당시의 정치상황에서 그 제안이 실현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갈리에누스 황제와 원로원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황제는 원로원으로부터 군사적 지휘권을 빼앗았으며, 원로원은 황제가 죽고 난 다음 황제를 먹칠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복수를 했다. 개인적으로는 황제가 플로티노스를 얼마나 존경했는지 몰라도, 플라토노폴리스를 장차 원로원의 세력 거점이자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모반의 중심지로 본 것은 황제로서는 불가피했을 것이다.

플로티노스의 가르침과 저작


플로티노스는 온 힘을 쏟아 가르치는 일에 매달렸고, 로마에서 첫 10년을 보내고 난 다음에는 저술에 힘을 기울였다. 그의 교수 방식이 다소 스콜라적이긴 하지만 그의 '학파'에는 아카데믹한 면이나 고도의 조직적인 면이 전혀 없었다. 그는 앞선 철학자들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에 붙인 주석서의 구절을 낭독하게 하고 그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개진하는 방식으로 모임을 이끌어 갔다. 그러나 이러한 모임은 친숙한 분위기에서 허물없이 진행되었으며, 플로티노스는 토론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일단 제기된 문제는 끝이 날 때까지 논의하곤 했다. 이 학파는 집단적인 조직을 갖추지 않고 가까운 친구와 숭배자로 이루어진 느슨한 형태의 모임이었다. 플로티노스는 이들을 위해 글을 썼으며, 이 글들이 바로 포르피리오스가 모아 편찬한 〈엔네아데스〉이다. 이 중 어떤 글은 그 난이도로 보아 학파 내부에서도 포르피리오스, 투스카니의 아멜리우스 겐틸리아누스(학파의 연장회원), 플로티노스의 의사였으며, 지금은 전해지지 않지만 그의 다른 저작들을 편집한 것으로 보이는 에우스토키우 등 절친한 친구와 공동 철학연구자를 위해 쓴 듯하다.

〈플로티노스의 생애〉의 몇몇 이야기와 〈엔네아데스〉의 어떤 구절을 보면 플로티노스가 당대의 종교적·미신적 분위기 속에서 어떤 종교적 태도를 취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당시의 대다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플로티노스도 마술을 믿었으며, 별의 운행으로 미래의 일을 점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점성술사에 대한 기괴하고 비도덕적인 맹신은 비난했다. 그가 비술(秘術)에 관심을 가진 것은 실용적인 목적보다 철학적인 관심 때문이었으며, 그가 실제로 마술을 부렸다는 분명한 증거도 없다. 한번은 올림피우스라는 사람이 플로티노스에게 마술을 걸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그가 마술을 부려 불러낸 저주의 힘은 오히려 플로티노스로부터 자신에게 되돌아오고 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또 플로티노스는 이집트의 이시스 사원을 방문해 주문을 외워 수호신령을 불러내려고 한 적이 있다. 포르피리오스에 따르면 보통의 수호천사 대신 신이 나타났는데, 주문을 잘못 외는 바람에 신에게 아무 것도 물을 수 없었다고 한다. 플로티노스 개인이 주술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분명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거기에 깊이 빠져들지 않았던 것만은 확실하다.

플로티노스가 전래의 이교도 집단에 대해 취한 태도는 그가 보여준 존경할 만한 초연한 자세 가운데 하나이다.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동료 철학자인 아멜리우스는 경건한 사람으로서 제물을 바치는 의식에 참석하기를 좋아했다. 플로티노스는 그러한 제의에 참석하기를 거부했지만 그를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멜리우스는 열렬한 신도였지만 변함없이 플로티노스의 친구였으며 협조자로 남았다. 플로티노스가 교류한 사람들 가운데는 그노시스 학파(이단적인 그리스도교 이원론자들로서 秘義的인 복음 지식을 강조했음)의 추종자들도 있었다. 이들에게서 자극을 받은 플로티노스는 이들의 신념을 공격하는 글을 줄기차게 썼을 뿐만 아니라, 포르피리오스와 아멜리우스를 중심으로 이들을 논박하는 논쟁집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플로티노스가 그노시스 학파를 공격한 이론적 근거는 어느 정도 정통 그리스도교에 의존해 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교에 정통했다거나 로마 교회와 접촉을 가졌다는 증거는 없다. 그가 보기에 그노시스 학설은 야만적·통속적·비합리적·비도덕적·비그리스적이며, 정신 나간 오만한 미신에 지나지 않았다. 플로니노스에게 종교가 있었다면, 순수한 지성에 의지해 선(善)과 신비적으로 합일하려는 소망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차분하면서도 굳건한 마음으로 이를 실천하고 가르쳤다.

말년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건강이 매우 나빠진 플로티노스는 고통스럽고 비참한 투병생활을 계속했다. 포르피리오스가 묘사한 그의 증세는 너무도 모호해서 오늘날에는 의사에 따라 결핵으로 판단하기도 하고 나병으로 보기도 한다. 플로티노스가 병에 걸리자 친구들은 그를 멀리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그는 한 친구가 소유하고 있는 캄파니아 지방의 시골농장에 은거했는데 거기서 1년도 못 되어 죽었다(270). 동료 모임은 이미 해체되었고, 포리피리오스는 우울증을 치유하도록 플로티노스 자신이 시실리로 떠나보낸 터였으며, 아멜리우스는 시리아에 머물고 있었다. 그를 치료하던 에우스토키우스만이 플로티노스의 죽음을 볼 수 있었다. 플로티노스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너의 신이 만유(萬有)의 신으로 돌아가도록 노력하라", 또는 "나는 우리의 신이 만유의 신으로 돌아가도록 노력하고 있다"라는 말이었다. 어느 경우든 그 말은 고대 후반기를 살았던 신앙심이 깊은 철학자들이 한결같이 품고 있던 신념을 단적으로 표현해주고 있다.

A. H. Armstrong 글

출처: http://tiny.britannica.co.kr/bol/topic.asp?mtt_id=10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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