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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

죽은 자를 위한 일곱가지 설법. Septem Sermones ad Mortuos

관리자 | 2012.05.08 15:03 | 조회 2477
칼 융의 저작으로 알려진 글이지만,
그가 영적인 명상을 통해 얻게 된 설법이라고 합니다.

플레로마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바실리데스와 깊은 영향을 지니고 있는 글입니다.


죽은 자를 위한 일곱가지 설법. Septem Sermones ad Mortuos

죽은 자를 위한 일곱가지 설법. 알렉산드리아의 바실리데스에 의하여 기술되었다. 그 도시는 서양과 동양이 만나는 곳에 있다.

설법 I
죽은 이들은예루 살렘에서 돌아왔다. 그들은 그곳에서 그드이 구하던 것을 얻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나의 문하로 들어오기를 간절히 원했고 내게 가르침을 구했다. 그래서 내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법을 한 것이다.

듣거라, 나는 無에서 시작하겠다. 無란 有와 같은 것이다. 영원한 것 속에서는 충만한 것이 빈 것과 같다. 無란 空이 충만한 것(有)이다. 그들은 무에 대해서 다르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컨데 그것이 희다든가 ,검다든가 혹은 그렇지 않다든가, 그렇다든가, 끝없는 것과 영원한 것은 아무런 성질도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성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無 혹은 有(충만)을 우리는 플레로마(Pleroma)라고 부른다. 그 속에서는 사고와 존재가 정지된다. 왜냐하면 영원하고 무궁한 것은 아무런 성질도 갖고 있지 않기 대문이다. 그 속엔 아무런 성질도 없다. 왜냐하면 어떤 성질이 있다면 그건 플레로마와 구별될 것이고 구별될 만한 성질을 지닌 것이 될 것이다.
플레로마에는 아무것도 없고 또한 모든 거이 있다. 플레로마에 관해서 기이 생각하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스스로 해소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크레아투르(Creatur, 생물, 창조된 것-역주)은 플레로마 속에 있지 않고 그 자체에 있다. 플레로마는 크레아투르의 시작이고 끝이다. 마치 태양의 빛이 공기를 온통 투과하듯이 그것은 크레아투르를 꿰뚫고 지나간다. 플레로마는 그렇게 철저하게 통과하지만 크레아투르는 거기 참여하지 않는다. 마치 완전한 투명한 물체가 그것을 투과하는 빛으로 밝아지지도 어두워지지도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우리는 플레로마 그 자체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원하며 무한한 것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참여하지 않고 플레로마로부터 끝없이 멀리 떨어져 있다. 공간이나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거리가 멀다. 우리는 시간, 공간적으로 제한된 피조물로서는 플레로마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플레로마의 일부인 만큼 플레로마는 우리 안에도 있는 것이다. 가장 작은 점에서도 플레로마는 영원하며, 무한하고, 온전하다 왜냐하면 작고 큰 것은 그 속에 내포된 성질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디서나 온전하며 그침이 없는 無이다. 그러므로 나는 피조물을 플레로마의 일부로서 오직 상징적으로만 말한다. 그것은 플레로마가 無이므로 진실로 결코 나누어진 바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전체 플레로마이다. 왜냐하면 상징적으로 플레로마는 우리 속에 있는 오직 가상적인, 실재하지 않는 가장 작은 점이며 우리 주위를 둘러싼 무한한 세계의 지붕이기 때문이다. 플레로마가 전체이며 동시에 無라면 왜 우리는 플레로마를 말하는가?
내가 그것을 말하는 것은 어디서든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고 너희들에게 어딘가 바깥이나 안에 처음부터 확고한, 또는 어떤 정해진 것이 존재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거두기 위함이다. 온갖 확고한 것, 또는 분명한 것은 다만 상대적인 것이다. 오직 변화를 입도록 되어 있는 것만이 확고하며 결정적이다.
그러나 변화될 수 있는 것은 크레아투르 뿐이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확실하며 결정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 자체가 특성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묻는다. 크레아투르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하고, 피조물들은 생겨났지만 그것은 생겨난 게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플레로마 그 자체의 성질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창조요 영원한 죽음이다. 크레아투르는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죽음도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플레로마는 구별되는 것이든 구별되지 않는 것이든, 모든 것을 지니고 있다.
구별성은 크레아투르이다. 그것은 다른 것과 구별된다. 구별성이 그것의 본체이므로 그것은 또한 사물을 구별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구별한다. 그의 본체는 구별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플레로마의 성질을 그것이 존재하지 않아도 구별한다.인간은 플레로마의 성질을 그의 본체에 입각해서 구별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플레로마의 성질에 관해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말해야 한다.
그대들은 말한다. 거기 관해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플레로마에 관해서 생각해야 소용 없다고, 너 자신도 말하지 안았느냐고.

나는 그대들에게 그대들이 플레로마에 관해 생각할수 있다고 믿는 망상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만약 우리가 플레로마의 특성들을 구별하면 우리는 우리의 분별성에 입각해서 말하는 것이며, 우리의 분별성에 관해 말하는 것이지 플레로마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말한 것이 없다. 그러나 우리의 분별성에 관해 말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이로써 우리는 충분히 구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본체는 구별성이다.만약 우리가 이런 본체에 충실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충분히 구별할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 성질들의 구별을 해야한다.

그대들은 묻는다. 스스로 다른 것과 구별하지 않는대고 해서 무엇이 나쁘냐고,

만약 우리가 구별치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본체를 떠나게 된다. 크레아투르를 떠나서 플레로마의 다른 성질인 무분별성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플레로마 그 자체에 빠지고 피조물임을 포기한다. 우리는 無속에 해소되어 버린다.

이것은 크레아투르의 죽음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구별하지 않는 만큼 그만큼 죽는다. 그러므로 크레아투르는 자연히 구별, 태초의 위험한 동시성에 대한 사ㅅ움을 지향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사람들은 개성화 원리라고 부른다. 이 원리는 크레아투르의 본체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그대들은 왜 무분별성과 구별치 않는 것이 크레아투르(창조물)에게 커다란 위험인가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플레로마의 성질을 구별해야 한다. 그 성질은 여러가지 대극의 쌍들이다. 즉,

효력과 효력 없음,
충만함과 공허함.
살아있는 것과 죽은것
상이한 것과 동일한 것
밝음과 어둠
뜨거움과 차가움
힘과 물질
시간과 공간
선과 악
미와 추
일자와 다자 등

대극쌍들은 플레로마의 성질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지양하므로 존재치 않는것이다. 우리는 플레로마 자체이므로 우리도 또한 이 모든 성질들을 우리 속에 갖고 있다. 우리의 본체의 바탕이 분별성이므로 우리는 이 성질을 분별성의 이름과 표지로 가지고 있다. 즉,

'첫째, 이 성질들은 우리 속에서 서로 다르고 따로따로 떨어져 있으므로 그것들은 스스로를 지양하지 못하고 작용력을 발휘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극쌍들의 희생물이다. 우리 내부에서 플레로마는 산산조각이 된다.

둘째, 이 성질들은 플레로마에 소속된다. 우리는 그것들을 오직 상이성의 이름과 표지로만 소유하거나 체험할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 우리는 특성과 구별해야 한다. 플레로마 안에서 그것들은 해소된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그 특성들과 구별하는 것만이 해결책이다.

만약 우리가 좋은것, 아름다운 것을 지향하면 우리는 우리의 분별성이라는 볼질을 잊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대극쌍들은 플레로마의 성질에 사로잡히게 된다. 우리는 좋은것과 아름다운 것에 도달하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동시에 악함과 추함을 얻는다. 왜냐하면이것들은 선과 아름다움과 함께 플레로마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본질을 충실히 지킨다면, 다시말해서 분별성을 충실히 지킨다면, 우리는 선과 미를 구별하며 그러므로 뚜한 악을 추함에서 구별한다. 그리하며 플레로마에 빠지지 않는다. 즉 無에 빠져서 그 속에 소멸되지 않는다.

그대들은 이론異論을 제기할 것이다. 그대는 차이성과 동일성이 모두 플레로마의 성질이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우리가 그 차이성을 지향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본질에 충실한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고 만약 우리가 차이성을 지향한다면 우리는 그때도 동일성에 빠져야 하는건가?

그대들은 플레로마가 아무런 성질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생각함으로써 만들어낸다. 그러니까 만약 그대들이 차이성이나 동일성, 혹은 그 밖의 성질을 지향한다면 그대들은 이때 플레로마에서 그대들에게 흘러나오는 생각들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플레로마의 존재하지 않는 성질에 관한 생각을 지향하는것이다. 그대들이 이런 생각들을 좇아서 달려가는 동안 그대들은 다시금 플레로마 속으로 빠져들어 동시에 차이성과 동일성에 도달한다. 그대들의 생각이 아니라 그대들의 본질이 분별성인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그대들이 생각하는 차이성을 지향할 것이 아니라. 그대들의 본질로 향해야 한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오직 하나의 지향적 노력이 있을뿐이다. 즉 자기 고유의 본질을 향해서 노력하는것이다. 만일 그대들이 이 노력을 하고 있다면 그대들은 플레로마와 그 성질에 관해서 아무것도 알 필요가 없다. 그리고 그대들 자신의 볼지에 의해서 올바른 목표에 도달한다. 그러나 생각이 본질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되므로 나는 그대들에게 어떻게 하면 그대들의 생각의 고삐를 조일 줄 알게 되는지 그 지식을 그대들에게 가르치겠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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